조선 시대에 다섯 살짜리 아이가 세종대왕에게 시를 지어 바치고 비단 오십 필을 하사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아이가 김시습이다. 신동 중의 신동으로 불리며 당대 최고의 스승들에게 배우고, 누구나 그의 앞날을 기대했다. 그런데 이 천재는 결국 벼슬 한 자리 하지 못하고 전국을 떠도는 방랑자로 생을 마쳤다.
왜 그랬을까.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시대가 그를 버린 것이 아니라, 그가 시대와 타협하지 않기로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김시습의 삶은 재능을 가졌으나 세상과 화합하지 못한 비극으로 읽힐 수도 있고, 불의 앞에서 끝까지 자신을 지킨 사람의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다. 어느 쪽으로 읽든, 그의 선택이 얼마나 단단한 것이었는지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천재 신동의 출발
김시습은 태어난 지 여덟 달 만에 글에 관심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세 살 때 시를 짓기 시작했고, 다섯 살에 이미 대학, 맹자, 시경, 서경, 주역을 익혔다. 당대 최고의 유학자들이 앞다퉈 그를 가르치려 했고, 좌의정 허조는 이 어린아이의 시에 감탄했다. 세종대왕이 그 소문을 듣고 직접 불러 시험해보고 비단을 하사했다는 일화는 그가 어느 수준의 천재였는지를 보여준다.
이름 시습(時習)은 논어의 첫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배우고 때에 맞게 익힌다는 뜻이다. 그 이름처럼 그는 스펀지처럼 지식을 흡수했다. 앞날은 창창해 보였다.
그런데 삶은 그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열다섯 살에 어머니를 잃었고, 곧이어 외할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와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았다.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을 먼저 보냈다. 과거 시험에 낙방하는 경험도 했다. 천재로 불리던 아이가 연이은 좌절과 상실을 겪으며 삼각산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홀로 공부에 매달렸다.
계유정난 – 돌이킬 수 없는 선택
김시습의 삶을 완전히 바꾼 사건은 계유정난이었다.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는 삼각산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사흘 동안 통곡했다.
통곡이 끝난 후 그는 자신이 읽던 책을 모두 불태웠다. 그 책들을 공부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꿈이 있었을 것이다. 세상에 나아가 백성을 위해 일하겠다는 뜻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뜻을 펼칠 세상이 이미 무너져버렸다. 불의가 권력의 자리를 차지한 세상에서 그 권력 아래서 벼슬하며 살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출가했다. 법명은 설잠이었다. 이후 그는 세조의 조선에서 공식적인 벼슬을 하지 않은 채 살았다. 이것이 단순한 도피가 아니었다는 것은 이후 그의 행동들이 보여준다.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당한 이들의 시신을 밤에 몰래 수습해 묻어주었다. 반역자로 낙인찍힌 이들의 시신을 거두는 행위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는 그것을 했다.
권력 앞에서 보여준 태도
세조가 그를 등용하려 했다. 당대 최고의 천재라는 소문이 여전했으니 왕이 관심을 가졌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김시습은 왕명을 거부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절의 똥통에 빠져 왕이 부르는 자리에 나타날 수 없게 했다.
한명회는 당시 세조의 가장 핵심적인 공신이었다. 계유정난을 설계한 장본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다. 한명회가 자신의 정자에 시를 걸어두었는데, 김시습이 그 시를 고쳐 붙였다. 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히네. 한명회가 분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영의정 정창손에게는 직접 호통을 쳤다. 그만두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에 정창손은 아무 대꾸도 못 하고 자리를 피했다. 신숙주가 술에 취한 그를 데려와 좋은 옷을 입히고 재웠더니, 깨어난 다음 비단 이불을 걷어차고 옷을 벗어던지며 나가버렸다.
이 행동들의 공통점이 있다. 그는 세조 체제에서 권력을 가진 인물들에게 단 한 번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그랬다. 이것은 충동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계유정난을 목격한 이후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일관되게 유지된 태도였다.
방랑 속의 글쓰기 – 금오신화
경주 남산에 금오산방을 두고 매월당이라는 호를 지었다. 그곳에서 칠 년을 머물며 쓴 것이 금오신화다. 한국 최초의 한문 소설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당시 유학자들은 귀신 이야기를 다루는 것을 금기로 여겼다. 그런데 금오신화의 다섯 이야기는 모두 산 사람과 귀신의 사랑을 다룬다. 만복사저포기에서는 총각이 귀신이 된 처녀와 사랑을 나누고, 이생규장전에서는 선비가 죽은 부인의 귀신과 다시 만나 함께 살다가 따라 죽는다.
이 이야기들을 단순한 귀신 소설로 읽으면 뭔가 빠진다. 각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능력이 있으나 세상에서 뜻을 펼치지 못하는 인물들이다. 살아서 이루지 못한 것을 죽음 너머에서라도 완성하려는 욕망이 담겨 있다. 김시습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천재였으나 세상에서 제대로 쓰이지 못한, 꿈이 있으나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
금오신화는 금서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불타거나 일본으로 약탈되기도 했다. 그 내용이 알려진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유불도를 아우른 사상
김시습은 유교, 불교, 도교 어느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율곡 이이는 그를 두고 유학의 마음을 두었으나 불교를 실천했으며, 승려이면서 유학자였다고 평했다. 서거정은 공자이면서 불자이고 노장이었으나 동시에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고 했다.
그 자신은 유불도의 근원적인 이론은 모두 하나라고 주장했다. 호와 법명이 그것을 보여준다. 매월당은 유학자로서의 지향을, 설잠은 불교적 삶을, 청한자는 도교적 영향을 담고 있다.
백성에 대한 생각도 시대를 앞서 있었다. 임금은 백성을 부리는 존재이며, 민심이 군주의 흥망을 결정한다고 썼다. 곡식 창고, 재물 창고, 세금, 모두 백성의 것이므로 임금은 백성의 삶을 헤아려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조선 초기에 이런 글을 쓴 것은 상당히 급진적인 일이었다.
이황은 그를 괴이한 사람이라 평했지만, 그의 절개가 높았던 것은 시대가 어지러웠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다. 율곡 이이는 대의 스승이라고 불렀다.
마지막까지 놓지 않은 것
사십 대 후반에 그는 다시 속세로 돌아와 머리를 기르고 재혼했다. 그러나 부인이 또 일찍 세상을 떠났고, 그는 다시 떠났다. 성종 즉위 후 인재 등용의 소문이 돌자 벼슬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세조의 편에 섰던 인물들이 여전히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을 접었다.
마지막으로 부여 무량사에 머물다 눈을 감았다.
그가 평생 한 가지 놓지 않은 것이 있다면 꿈이었다.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아도, 권력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두 번 결혼했던 부인들을 먼저 보내도, 전국을 떠돌아도, 그는 글을 쓰고 생각하고 백성을 걱정했다. 금오신화가 그것의 증거다. 그 책은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뜻을 포기하지 않은 채 쓴 이야기들이었다.
내 경험
김시습을 처음 접한 것은 금오신화를 통해서였다. 솔직히 처음에는 조선 시대 귀신 이야기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생규장전을 읽으면서 뭔가 이상하게 마음이 걸렸다. 선비가 죽은 부인의 귀신과 다시 만나 함께 살다가 부인이 떠나자 따라 죽는 이야기인데, 단순한 사랑 이야기라기보다는 이루지 못한 무언가에 대한 집착처럼 읽혔다.
나중에 김시습의 생애를 따라가며 읽고 나서야 그 이야기들이 다르게 보였다. 살아서 이루지 못한 꿈을 죽음 너머에서라도 완성하려는 인물들. 그게 김시습 자신이었다. 세종대왕 앞에서 시를 짓던 다섯 살 신동이 결국 벼슬 한 자리 없이 방랑하다 마친 삶. 그런데 그 삶의 끝에 금오신화가 있다.
한명회의 정자에 붙은 시를 고쳐서 달았다는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히네. 이 말을 실제로 했다는 것이 믿기 어려울 만큼 배짱 있는 행동이었다. 당시 한명회가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김시습은 그걸 했다. 단순한 객기가 아니라 이십 년 넘게 유지해온 태도의 연장이었다.
개인적으로 김시습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드는 질문이 있다. 만약 계유정난이 없었다면 그의 삶은 어떻게 됐을까. 그 재능으로 조정에 나아가 일했을 것이다. 아마 훌륭한 관료로 이름을 남겼을 것이다. 그런데 그랬다면 금오신화도 없었을 것이고, 유불도를 아우르는 그 독특한 사상도 이렇게 발전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타협하지 않기로 한 선택이 결국 그를 달리 만들었다.
내 생각 / 비판
김시습을 이야기할 때 흔히 불의에 타협하지 않은 영웅처럼 그린다. 그런데 그 이면을 생각해보면 그의 삶이 단순히 아름답게 정리되지 않는다.
그는 실제로 효령대군의 부탁으로 불경 언해 사업을 돕고 원각사 낙성회 찬시를 지었다. 세조 체제에 완전히 등을 돌린 것이 아니라, 직접 세조와 마주치지 않는 선에서는 협력하기도 했다. 이것을 어떻게 볼 것인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절충이라고 볼 수도 있고, 생존을 위한 현실적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다.
또 그의 방랑이 진정한 저항이었는지, 아니면 세상과 맞서기 어려운 현실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도피였는지도 쉽게 답하기 어렵다. 권력에 직접 맞서지 않고 떠나버리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저항인가라는 질문이 생기기도 한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는 세조 체제에서 아무도 쉽게 하지 못할 말을 실제로 했다. 한명회에게, 정창손에게, 신숙주에게. 말뿐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보여줬다. 단종 복위 사건 연루자들의 시신을 몰래 수습한 것은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이것이 단순한 고집이나 기질의 문제가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유지된 신념이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금오신화에 대해서도 한마디 덧붙이고 싶다. 이 작품을 한국 최초의 한문 소설집이라는 문학사적 의미로만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금오신화의 진짜 가치는 그 내용이 갖는 저항적 성격에도 있다. 귀신 이야기를 금기시하던 시대에 귀신과의 사랑을 다섯 편이나 썼다는 것, 뜻을 이루지 못한 인물들이 죽음 너머에서라도 꿈을 이루려 한다는 주제, 이것이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시대에 대한 발언이었다는 시각으로 읽어야 이 책이 제대로 보인다.
FAQ
Q1. 김시습은 왜 출가를 선택했나요?
세조의 계유정난, 즉 어린 단종을 몰아낸 왕위 찬탈에 충격을 받고 사흘 동안 통곡한 후 책을 모두 불태우고 출가했습니다. 불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 권력 아래 벼슬을 하며 사는 것이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Q2. 금오신화는 어떤 책인가요?
한국 최초의 한문 소설집으로 평가받는 작품으로, 산 사람과 귀신의 사랑을 다룬 다섯 편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당시 유학자들이 귀신 이야기를 금기시하던 분위기에서 쓰였다는 점에서 매우 혁신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이후 금서로 지정되었고, 임진왜란 때 많은 부분이 소실되거나 일본으로 유출되었습니다.
Q3. 김시습이 유불도 삼교를 모두 공부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는 유불도의 근원적인 이론은 모두 하나라고 주장했습니다. 어느 하나의 틀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여러 사상을 탐구하며 자신만의 철학을 구축했습니다. 이 폭넓은 사상적 탐구는 고정된 체제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그의 삶의 태도와도 연결됩니다.
Q4. 이황과 율곡 이이는 김시습을 어떻게 평가했나요?
이황은 괴이한 사람으로 보면서도 높은 절개가 시대의 어지러움 때문이었다고 이해했습니다. 율곡 이이는 훨씬 호의적으로 그를 대의 스승이라고 칭하며 극찬했습니다. 같은 인물을 두고 시각이 크게 달랐다는 것이 김시습이라는 인물의 복잡성을 보여줍니다.
Q5. 김시습의 백성에 대한 생각은 어떤 내용인가요?
임금은 백성을 위해 존재하며, 민심이 군주의 흥망을 결정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나라의 재물과 자원이 모두 백성의 것이므로 임금은 백성의 삶을 헤아려야 한다는 내용을 에민의라는 글에 담았습니다. 조선 초기에 이런 시각을 명문으로 남긴 것은 매우 앞서간 생각이었습니다.
Q6. 김시습이 끝까지 벼슬을 하지 않은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세조 체제를 인정하는 행위가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종 즉위 후 다시 벼슬을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세조 시절 공신들이 여전히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을 접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기준을 끝까지 유지하려는 태도였습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해석과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역사적 해석은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