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은 어떻게 괴물이 되었는가 – 애국자에서 매국노로의 변절
🏷️ 이완용, 을사늑약, 경술국치, 한국근현대사
매국노의 대명사, 그런데 독립협회 회장이었다
이완용이라는 이름은 한국에서 매국노의 대명사로 통한다. 을사늑약에 서명하고 경술국치를 주도한 인물. 그런데 이 사람이 한때 독립협회의 회장이었고, 독립문 현판 글씨를 썼다는 기록이 있으며, 독립신문에서 "백성을 구원하는 인물"이라고 극찬받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완용의 이야기가 불편한 이유는 그가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변절의 과정이 있었고, 그 과정에는 냉혹한 국제 정세와 외교적 실패, 그리고 개인의 선택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단순히 그를 악인으로 규정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이유가 있다.
양자로 들어가 출세의 길을 연 인물
이완용은 몰락한 양반 집안 출신이었다. 열 살 때 흥선대원군과 친분이 있던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출세의 길이 열렸다. 명문가 자제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양자로 들어간 경험이 그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눈치를 많이 보는 성격이 됐고, 양아버지로부터 처세에 대한 조언을 들으며 자랐다. 내성적이고 점잖으며 유교적 선비의 풍모를 가졌다는 평가가 있다. 학문이 높고 글씨를 잘 쓰는 명필가였다. 임오군란 이후 열린 과거 시험에서 병과 18등으로 합격했다. 높은 등수는 아니었지만 양아버지의 권세로 칠품 벼슬을 받았다. 그 이후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미국 공사관 참찬관으로 파견되면서 본격적인 외교관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본 세계, 그리고 변화의 시작
고종은 자주 외교를 위해 미국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영어 교육을 위한 유경공원을 설립했고, 이완용은 그곳에서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고종의 눈에 들었다. 주미 공사 박정양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고, 박정양이 자주 외교를 펼치다 청나라의 압박으로 소환된 후 약 2년간 실질적인 주미 공사 역할을 수행했다. 미국에서 본 것들이 이완용에게 큰 충격이었다. 대륙 횡단 철도, 삼권 분립의 정치 체계, 발전된 교육 제도. 조선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동시에 그는 만국공법, 즉 당시 국제법을 공부하면서 냉혹한 현실을 깨달았다. 강대국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법이 활용되고 있다는 것, 결국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귀국 후 학부대신이 된 이완용은 성균관에 과학과 수학 과목을 도입하고 초등학교 의무 교육을 추진하는 등 교육 개혁을 단행했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그는 나라의 발전을 위해 일하는 관료였다.
독립협회 시절의 이완용
이완용은 독립협회 설립에 주축이 된 인물이었다. 초대 위원장과 2대 회장을 모두 역임했다. 독립문 건립에 가장 많은 기금을 냈고, 독립문 현판 글씨를 썼다는 기록도 있다. 독립신문은 그를 "애국 애민하는 마음을 가진 백성을 구원하는 인물"이라고 극찬했다. 러시아가 조선의 이권을 요구할 때 이완용은 적극적으로 맞섰다. 서양 열강의 이권 침탈에 반대하는 자주 외교 노선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화근이 됐다. 러시아의 압력으로 전라북도 관찰사로 좌천됐다. 미국인 알렌의 일기에 따르면 러시아 공사가 "이완용을 가장 나쁜 사람"이라 칭하며 조선에서 벼슬을 얻지 못하게 하려 했다고 전해진다. 좌천 기간 중에도 민생을 살피는 모습을 보였다. 재방을 쌓는 등의 공으로 공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중앙 정계에서 멀어진 상황이었다. 공금 횡령 누명까지 씌워지고 독립협회에서 제명됐다. 양아버지가 사망하면서 3년상을 치르는 동안 중앙 정계로의 복귀가 더 늦어졌다.
결정적 전환점 – 가쓰라태프트 밀약
러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고종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다시 미국과의 외교를 이완용에게 맡기려 했다. 이완용은 미국을 믿었다. 오랫동안 친미파로 활동했고, 미국의 선진적인 모습을 직접 목격했으며, 미국이 조선을 도울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알게 된 것은 배신이었다.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다. 미국이 필리핀을 차지하는 대가로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완용이 외교적으로 의지했던 나라가 조선을 일본에 넘긴 것이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포츠머스 강화 조약으로 한국에서의 일본 우월권이 국제적으로 인정됐다. 이완용의 판단에 변화가 생겼다. 미국도 조선을 버렸고, 일본은 전쟁에서 이겼다. 힘의 논리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을 미국에서 만국공법을 공부할 때 이미 깨달았던 그였다. 일본의 힘을 인정하고 그 요구에 응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을사늑약부터 경술국치까지
1905년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을 협박하며 외교권을 일본에 넘길 것을 강요했다. 조정 대신들이 망설이는 가운데 이완용이 나섰다. 일본의 제의를 수렴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며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완용을 "탁월한 용기를 갖춘 비범한 인물"이라 칭찬했다. 전국에서 비난이 쏟아지자 이완용은 "종묘 사직을 지키기 위한 일시적 조치"라고 정당화했다. 그 이후의 행적은 더 나빠졌다. 고종이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자 강제 퇴위를 주도했고, 순종 즉위 후 정미조약을 체결해 한국 정부가 일본 통감의 지도를 받도록 했다. 군대가 해산되고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일본군 동원을 요청해 진압했다. 의병장 허위에게 사형을 주장해 최초의 사형당한 의병장을 만들었다. 1909년에는 사법권을 일본에 넘겼고 1910년 국권 완전 상실을 주도했다. 경술국치의 공로로 백작 작위를 받았고, 3.1 만세 운동 진압에 기여한 공로로 후작 작위를 받았다. 이토 히로부미를 스승이라 칭하며 시를 지어 바쳤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을 때 이완용은 격분했고, 이토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달려갔다.
이재명 의사의 의거와 최후
1909년 이재명 의사가 명동성당 앞에서 이완용에게 칼을 휘둘렀다. 치명상을 입었지만 일본 의사의 수술로 살아났다. 이재명 의사는 재판에서 "2천만 민족이 찬성한다"고 말하며 사형을 받았다. 이완용은 3,700평 규모의 집에서 살며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그의 장례식은 고종의 장례식만큼 화려했다. 동아일보는 "팔지 못할 것을 팔아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 천벌을 받아야 한다"고 비판했다. 일본이 작성한 조선 공로자 명감에는 "동양의 인걸, 불세출의 인물"로 칭송됐다.
내 경험 – 불편한 진실 앞에서
이완용의 이야기를 처음 깊이 파고들었을 때 솔직히 당혹감이 컸다. 독립협회 회장이었다는 사실, 독립문과 연관됐다는 기록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되면 이완용이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야기를 접했을 때 다른 감각이 왔다. 이완용이 의지했던 미국이 실제로 조선을 일본에 넘겼다는 것. 그 배신의 충격이 이완용의 변절 과정에서 얼마나 컸을지를 생각하게 됐다. 물론 같은 상황에서도 독립운동의 길을 택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니 이완용의 선택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다만 그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단순히 악인이라고 규정하는 것보다 역사를 더 정직하게 보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화관 이야기가 특히 인상 깊었다. 3.1 만세 운동이 시작된 그 장소가 이완용의 별장이었다. 독립운동의 상징적 공간이 매국노의 별장이었다는 아이러니가 역사의 복잡성을 보여준다. 역사는 단순한 선악 구도로 정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 사실이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완용의 증손자가 소송을 통해 환수받은 땅 이야기를 읽으면서 오래 생각에 잠겼다. 국가가 환수한 이완용의 땅이 전체의 0.05%에 불과하다는 것도 놀라웠고, 그 재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도 불편했다. 변절의 결과가 현재에도 이어진다는 것이 역사를 단순히 과거의 일로만 보기 어렵게 만든다.
내 생각 / 비판 – 단순한 악인론을 넘어
이완용의 이야기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해석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그를 처음부터 악인으로 단순화하는 것이다. 이완용이 독립협회 회장이었고 자주 외교를 위해 활동했다는 사실은 그의 변절이 단순한 개인적 탐욕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냉혹한 국제 정세의 현실, 미국에 대한 외교적 배신감, 일본의 군사적 우위라는 맥락이 있었다. 이것을 이해해야 이런 변절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어떻게 반복되지 않을 수 있는지를 생각할 수 있다. 둘째는 정반대로 그를 정세를 읽은 현실주의자로 이해하거나 변절을 합리화하는 방향이다. 같은 시대, 같은 국제 정세를 보면서도 독립운동의 길을 택한 사람들이 있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을 직시했다고 해서 그 현실에 순응하는 것이 유일한 선택은 아니었다. 이완용의 선택은 개인의 안위와 권력을 향한 계산이 개입된 것이었다. 이완용의 이야기가 지금도 의미가 있는 이유가 있다. 변절은 극단적인 순간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작은 타협이 쌓이고, 현실이라는 명분이 붙고, 한 번 방향이 바뀌면 돌아오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구조다. 이완용이 처음부터 나라를 팔 생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 그가 걸어온 길의 어느 지점에서 방향을 바꿨다는 것. 이것이 이 이야기를 역사 속 악인의 이야기로만 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1. 이완용이 독립협회 회장이었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그렇습니다. 이완용은 독립협회의 초대 위원장과 2대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독립문 건립에 가장 많은 기금을 냈고, 독립신문에서 애국
애민하는 인물로 극찬받았습니다. 이 시기의 이완용은 자주 외교를 강조하고
러시아의 이권 요구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Q2. 이완용이 친일로 변절한 결정적 이유는 무엇인가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이완용이 외교적으로 의지하던
미국이 필리핀을 차지하는 대가로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한 것입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국제적으로 일본의 우월권이 인정되자, 힘의
논리를 따르는 방향으로 노선을 바꿨습니다.
Q3. 이재명 의사의 의거는 어떤 사건이었나요?
1909년
이재명 의사가 명동성당 앞에서 이완용에게 칼을 휘둘러 치명상을 입힌
사건입니다. 이완용은 일본 의사의 수술로 살아났고, 이재명 의사는 재판에서
"2천만 민족이 찬성한다"는 말을 남기며 사형을 받았습니다.
Q4. 3.1 만세 운동이 시작된 태화관과 이완용은 어떤 관계인가요?
태화관은 원래 이완용의 별장이었습니다. 이완용의 집이 불에 타자 일본이
현종의 후궁 사당을 거처로 내어주었고, 이완용은 이곳을 별장으로 사용했습니다.
이 장소에서 3.1 만세 운동이 시작됐다는 것이 역사적 아이러니입니다.
Q5. 이완용의 재산은 지금도 후손에게 이어지고 있나요?
상당 부분이 이어졌습니다. 국가가 환수한 이완용의 땅은 전체의 0.05%에
불과했으며, 이완용의 증손자는 소송을 통해 환수받은 땅도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친일의 대가로 축적된 재산이 현재까지 이어진다는 것이 역사 청산의
미완성을 보여줍니다.
Q6. 이완용의 변절을 어떻게 역사적으로 평가해야 하나요?
정세를 읽은 현실주의자로 합리화해서도 안 되고, 처음부터 악인이었다고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 냉혹한 국제 정세와 외교적 배신이라는 맥락이
있었지만, 같은 상황에서도 독립운동의 길을 택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완용의
선택은 결국 개인의 안위와 권력을 향한 계산이 포함된 것이었고, 그 결과는
역사에 분명한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 생각 한 줄
"이완용은 태어날 때부터 괴물이 아니었다. 냉혹한 현실을 읽는 능력과 개인의 안위를 향한 계산이 만나 변절을 선택했다. 그의 이야기가 불편한 이유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그 길을 걷고 있을지 모른다는 질문을 남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