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 시대 (오닌의 난, 사무라이, 막부정치)

 

일본 전국 시대의 시작, 오닌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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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 시대의 방아쇠를 당긴 오닌의 난(応仁の乱)은 1467년에 시작해 10년간 교토를 전쟁터로 만들었습니다.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솔직히 당혹스러웠습니다. 후계자 싸움 하나가 어떻게 100년에 걸친 혼란의 씨앗이 될 수 있었는지, 그 구조가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사물라이 사진


사무라이, 벚꽃처럼 지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다

일본을 이해하려다 막히는 지점이 있습니다. 섬세한 다도 문화를 가진 나라가 동시에 할복을 명예로운 죽음으로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이 이중성을 처음 인식한 것은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의 저서 <국화와 칼>을 접하면서였습니다. 베네딕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정부의 의뢰를 받아 일본의 국민성을 분석했는데, 일본을 직접 방문하지 않고 문헌과 인터뷰만으로 책을 완성했다는 사실이 지금도 회자됩니다. 이 책에 대한 비판도 분명히 알고 읽어야 합니다. 일본인 전체를 단일한 국민성으로 묶는 것은 과도한 일반화라는 지적이 있고, 전시에 적국을 분석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다는 맥락도 있습니다. '이중성'이라는 프레임 자체도 따져볼 여지가 있습니다. 예술과 폭력이 공존한 사례는 어느 문명에서든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중성이 일본만의 특성이라기보다 일본에서 유독 제도화되고 미화된 방식이 특이하다고 봅니다.

사무라이(侍)란 말 그대로 '섬기는 자'를 뜻합니다. 교토의 귀족을 섬기며 토지를 받는 지방 무사 집단을 가리켰으며, 항상 두 자루의 칼을 패용해야 했습니다. 포르투갈 선교사의 기록에는 "잠잘 때도 칼을 베개 맡에 두었다"고 묘사될 만큼, 칼은 사무라이 존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문화에서 탄생한 것이 부시도(武士道)입니다. 부시도란 무사의 도리를 규정한 윤리 체계로, 충성·명예·죽음을 일체로 여기는 정신을 뜻합니다.

47로닌(四十七士)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 정신이 얼마나 체계화되어 있었는지를 실감했습니다. 주군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할복당하자 47명의 무사가 2년을 기다려 복수를 완수하고 집단 할복한 이야기입니다. 한국이나 중국의 유교 문화에도 의리와 충성이 있지만, 죽음 자체를 이토록 의례화하고 숭배하는 방식은 결이 달랐습니다. 다만 이 정신이 2차 세계대전의 가미카제 특공대와 이어진다는 점에서, 미화 일색으로 보기 어렵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막부정치, 권위와 권력이 분리된 구조

일본의 정치 구조에서 가장 독특한 것이 막부정치(幕府政治)입니다. 막부정치란 천황이 아닌 무사 집단의 수장인 쇼군(将軍)이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는 체제를 말합니다. 천황은 상징적 권위만 보유하고, 쇼군을 임명하는 형식적 권한만 남았습니다. 이 구조의 뿌리는 헤이안 시대(平安時代)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후지와라 가문이 딸을 천황가에 시집보내며 외척으로 권력을 장악했고, 섭정(摂政)과 관백(関白)이라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섭정이란 어린 천황을 대신해 통치하는 직책이고, 관백은 성인 천황 옆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직책입니다. 부정부패가 심해지면서 지방 통제가 무너졌고, 그 공백을 메운 것이 무사 집단이었습니다.

무사 집단 중 가장 강성했던 겐지(源氏)헤이시(平氏)가 5년에 걸쳐 겐페이 전쟁(源平合戦)을 벌였습니다. 겐지가 승리하면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1185년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를 세웠습니다. 일본 최초의 무사 정권이었습니다. 이때 사용한 겐지의 흰 깃발과 헤이시의 붉은 깃발이 지금도 NHK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戦)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제가 처음 알았을 때 꽤 놀라웠습니다. 쇼군 아래에는 다이묘(大名)가 있었습니다. 다이묘란 쇼군으로부터 만 석 이상의 소출이 나오는 영지를 받은 지방 영주를 말합니다. 충성 경쟁의 결과물이 오사카 성의 거대한 석축입니다. 제가 직접 오사카 성을 방문했을 때, 그 화강암 성벽이 단순한 건축이 아니라 권력 과시의 흔적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오닌의 난이 전국 시대를 만든 방식

오닌의 난(応仁の乱)은 단순한 후계자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이 어떻게 100년 전국 시대의 출발점이 됐는지를 이해하려면, 그 전후 구조를 봐야 합니다.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는 정치에 무관심한 예술인으로 불렸습니다. 교토 동산에 은각사(銀閣寺)를 지은 인물이고, 정원·다도·꽃꽂이를 즐기며 빨리 쇼군직을 내려놓고 싶어 했습니다. 제가 이 인물을 처음 접했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수십만 군대가 교토에서 싸우는 동안 그가 은각사 정원을 가꾸고 있었다는 장면이었습니다. 무능한 것인지, 아니면 폭력적인 권력 구조 안에서 예술로 도피한 것인지, 지금도 판단이 쉽지 않습니다.

그의 아내 히노 도미코(日野富子)는 정반대였습니다. 막부 재정을 위해 고리대금업을 운영할 만큼 권력 의지가 강했고, 아들 요시히사(義尚)를 쇼군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문제는 요시마사가 이미 동생 기진(義視)을 후계자로 정해둔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이 갈등에 다이묘들이 편을 나눠 개입했습니다. 야마나 소젠(山名宗全)의 서군 11만, 호소가와 가쓰모토(細川勝元)의 동군 16만이 교토를 10년간 전쟁터로 만들었습니다.

오닌의 난이 전국 시대를 연 직접적인 메커니즘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오닌의 난에 참여하기 위해 교토로 올라간 슈고 다이묘(守護大名)들이 지방 영지를 대리인에게 맡겼습니다.
  2. 그 대리인들이 전쟁 중 영주 부재를 틈타 영지를 실질적으로 장악했습니다.
  3. 영지를 빼앗긴 슈고 다이묘들이 몰락하고, 배신으로 성장한 대리인들이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로 부상했습니다.
  4. 무로마치 막부는 명목만 남고 실질적 통치력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하극상(下克上)이라는 단어가 이 시대의 핵심입니다. 하극상이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실력으로 제치고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제도가 아니라 시대 정신이 되어버린 것이 전국 시대였습니다. 역사학계에서는 오닌의 난만이 아니라 막부 체제의 구조적 문제, 경제적 불평등, 중앙 권력의 장기적 약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봅니다. 전국 시대를 배신 한 번의 결과로만 설명하면 구조적 원인을 놓치게 된다는 점에서, 단일 원인 해석은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 전국 시대는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권력 구조의 균열이 쌓이다가 오닌의 난이라는 임계점에서 터진 것입니다. 저는 이 역사를 공부하면서, 어떤 시대의 혼란이든 그 출발점은 늘 신뢰의 붕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국 시대가 궁금하다면 오닌의 난부터 들여다보시길 권합니다. 그 다음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로 이어지는 흐름이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EC%9D%BC%EC%83%81%EC%9D%98%EC%9D%B8%EB%AC%B8%ED%95%99

📌 생각 한 줄

"오닌의 난은 후계자 싸움이 아니라 권력 구조의 봉합선이 터진 지점이었다. 무로마치 막부의 균열, 다이묘들의 이해 충돌, 지방으로 퍼져나간 하극상의 물결. 어떤 시대의 혼란도 결국 신뢰가 무너진 곳에서 시작된다는 사실, 일본 전국 시대는 그 역사적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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