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앞에서 (톨스토이, 실존적 질문, 인지 재구성)
🏷️ 톨스토이, 고통, 실존적질문, 인지재구성, 심리학, 외상후성장
가족 중 누군가 갑자기 아프면, 통증보다 먼저 찾아오는 것이 있습니다. "왜 하필 우리 가족에게." 작년 가을 저도 그 질문 앞에 오래 서 있었습니다.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계속 붙잡고 있으면 오히려 더 지칩니다. 그때 우연히 다시 펼친 톨스토이의 글이 그 질문을 다루는 방식을 조금 바꿔줬습니다.
고통 앞에서 우리가 공통으로 겪는 실존적 질문
실존적 질문(existential question)이란 "내가 왜 존재하는가", "이 고통은 왜 나에게 왔는가"처럼 논리로 해결되지 않는 근본적인 물음을 뜻합니다. 병의 원인은 의학으로 설명할 수 있어도, 왜 그 병이 하필 이 사람에게 찾아왔는지는 어떤 학문도 명확하게 대답해 주지 못합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며칠 동안 가장 소진되는 것은 체력이 아니라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정신 에너지였습니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더 일찍 병원을 데려갔어야 했나." 머릿속이 루프처럼 돌았습니다. 톨스토이는 이 상태를 꽤 정확하게 짚어냈습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현재의 고통만이 아니라 그 고통의 원인과 결과까지 함께 끌어안고 괴로워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동물은 다리를 다치면 회복에만 집중합니다. 위협이 사라지면 고통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인간의 고통에는 항상 서사(narrative)가 붙습니다. 서사란 쉽게 말해 '이야기 구조'입니다. 과거의 원인을 찾고, 미래의 결과를 예측하며, 그 사이에서 의미를 캐내려는 작업입니다. 이 구조 때문에 인간의 고통은 실제 신체 증상보다 훨씬 크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톨스토이가 특히 주목한 것은,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이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것을 단순히 삶의 즐거움이 고통보다 많아서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고통이 자신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봤습니다. 이 해석이 처음 읽을 때는 별로 와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며칠에 걸쳐 다시 읽으니 조금 달리 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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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가 말하는 고통의 의미, 핵심만 정리하면
톨스토이의 고통론은 종교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 핵심을 철학적으로 추리면 두 가지 구조로 설명됩니다. 그가 강조한 개념 중 하나가 외면적 의(外面的 義)와 내면적 의(內面的 義)의 구분입니다. 여기서 의(義)란 '옳음' 또는 '정의로움'을 뜻하는 한자어입니다. 외면적 의란 고통을 단지 없어져야 할 불행으로 보는 시선입니다. 개인의 행복만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고통이 오면 즉각 '불공정한 일'로 받아들입니다. 이 시선에서는 고통이 절망과 분노만 키웁니다. 반면 내면적 의는 고통을 자신과 타인의 삶이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속에서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같은 고통이어도 '내가 이것을 통해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라는 방향으로 해석됩니다.
제 경우를 대입해 보면, 가족이 아프다는 사실 자체는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을 "왜 우리에게"라는 질문으로만 채울 때와, "지금 내가 옆에 있어야 한다"는 방향으로 전환했을 때 하루를 버티는 무게감이 달랐습니다. 거창한 깨달음이 아니라, 시선의 방향이 조금 바뀐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가 생각보다 컸습니다.
톨스토이의 사상을 참고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아래 두 가지는 혼동하기 쉬운 부분입니다.
- 고통이 필요하다 = 고통받는 사람에게 이유가 있다? → 이건 톨스토이의 의도가 아닙니다. 그는 고통을 정당화하거나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려 한 게 아니라, 고통을 대하는 내면의 태도가 삶의 질을 바꾼다는 점을 말한 것입니다.
- 고통을 견디는 힘은 고통의 크기가 아니라 고통을 해석하는 틀에서 온다 → 같은 사건이어도 그것을 어떤 맥락에서 읽느냐에 따라 절망이 될 수도, 전환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심리학 분야에서도 이와 유사한 개념이 연구되어 있습니다. 외상 후 성장(PTG, Post-Traumatic Growth)이란 극심한 고통이나 트라우마를 경험한 후 오히려 심리적으로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현상을 뜻합니다. 톨스토이가 철학적 언어로 표현한 것을 현대 심리학이 다른 방식으로 증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 사상,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처음 읽을 때는 위로가 됐는데, 시간이 지나고 다시 보니 조심해야 할 부분이 보였습니다. 특히 톨스토이 사상에서 고통과 죄의식(guilt)의 연결 구조가 그렇습니다. 죄의식이란 자신이 도덕적으로 잘못을 저질렀다는 감정을 말합니다. 그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이 더 큰 절망을 낳는다고 봤는데, 이 논리를 잘못 적용하면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식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무고하게 사고를 당하거나 질병을 얻은 사람에게 이 프레임을 그대로 들이밀면 오히려 상처가 됩니다. 이 사상은 모든 고통에 적용되는 보편 공식이 아닙니다. 고통을 견디는 여러 시선 중 하나로 참고할 때 가장 유효합니다.
또 하나 현실적인 한계는 종교적 세계관을 전제로 한다는 점입니다. 신앙이 없는 독자라면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의 가치관에 맞게 재해석하는 편이 낫습니다. 예를 들어, 톨스토이가 말한 '신과의 관계 속에서 고통을 바라보는 시선'을 '나와 주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로 치환해도 핵심은 충분히 살아남습니다. 제 경험상 이 방식이 더 현실적으로 작동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정신 건강을 단순히 질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고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상태로 정의합니다. 고통을 개인의 불행으로만 가둬두지 않고 관계와 공동체 속에서 처리할 때 회복이 빠르다는 점은, 톨스토이의 내면적 의 개념과 상당 부분 맞닿아 있습니다.
고통을 바라보는 시선 하나를 바꾸면 생기는 일
제가 작년 가을에 경험한 것을 돌아보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 건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는 거창한 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훨씬 소박한 변화였습니다. 고통을 빨리 없애야 할 문제로만 볼 때는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전부 불안 요소로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족과 함께 통과해야 할 과정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니, 같은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인지 재구성(cognitive reframing)이란 어떤 사건을 바라보는 해석의 틀을 바꾸는 심리적 과정을 뜻합니다. 사건 자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를 조정하는 방법입니다. 톨스토이가 철학적으로 표현한 것이 이 과정과 닮아 있습니다. 고통의 원인에만 집중하면 무기력해지고, 고통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면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이 클수록 고통을 견디는 힘도 커진다는 톨스토이의 말은, 처음엔 관념적으로 들렸습니다. 그런데 가족 옆에서 그 시간을 보내고 나니 조금 다르게 들립니다. 자신의 행복만을 중심에 두는 시선에서 벗어나 관계 안에서 의미를 찾는 순간, 고통의 무게가 분산된다는 감각은 실제로 있었습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그건 위로의 말이 아니라 꽤 정확한 관찰에 가까웠습니다.
고통 앞에서 "왜 나에게"라는 질문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그 질문은 인간이라면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그 질문에 갇혀 있는 시간을 조금 줄이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로 방향을 돌리는 것. 그것이 톨스토이가 남긴 가장 실용적인 통찰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관심이 생기셨다면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고통을 철학이 아닌 이야기로 먼저 만나면 더 쉽게 들어옵니다.
📌 생각 한 줄
"고통 앞에서 '왜 나에게'라는 질문을 멈출 수는 없다. 그 질문은 인간이라면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그 질문에 갇혀 있는 시간을 조금 줄이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로 방향을 돌리는 것. 그것이 톨스토이가 남긴 가장 실용적인 통찰이다. 고통을 없애려 하지 말고, 고통을 통과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있는 무게가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