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천재 (허균, 이지함, 김시습)
🏷️ 허균, 이지함, 김시습, 홍길동전, 토정비결, 금오신화, 조선사
솔직히 저는 오랫동안 허균은 홍길동전 작가, 이지함은 토정비결 쓴 사람, 김시습은 생육신 중 하나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세 사람을 한 자리에 놓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 이 셋의 삶을 나란히 들여다보고 나서야 공통된 무언가가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능력이 탁월했지만 그 능력을 체제 안에서 소비하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그 대가를 고스란히 치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세 사람이 아웃사이더가 된 시대배경
일반적으로 조선을 유교 질서가 지배한 안정된 사회로 이야기하지만, 제 경험상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유교 이념에서 사농공상(士農工商)이란 신분에 따라 직업과 역할이 고정된 위계 질서를 뜻합니다. 쉽게 말해 선비가 가장 위에 있고 상인은 가장 아래에 있는 구조인데, 이 질서가 흔들리는 것 자체를 국가가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허균이 파직을 여섯 번, 유배를 세 번 당한 이유를 보면 그 구조가 얼마나 촘촘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기생과 어울렸다, 불교를 가까이했다, 서자 출신 스승을 따랐다는 것들이 징계 사유였습니다. 개인의 사생활 문제가 아니라 신분 질서를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된 것입니다.
이지함의 경우는 더 직접적입니다. 을사사화(乙巳士禍)란 1545년 외척 간의 권력 다툼으로 수많은 사림이 화를 입은 사건입니다. 이지함은 이 사건으로 절친한 벗과 장인을 잃었고, 그 뒤 현실 정치를 완전히 등졌습니다. 정치가 사람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몸으로 확인한 셈입니다.
김시습이 출가를 결심한 것도 계유정난(癸酉靖難) 때문이었습니다. 계유정난이란 1453년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은 정변을 말합니다. 3일간 통곡하며 책을 불태우고 머리를 깎았다는 기록을 처음 접했을 때, 저는 그것이 단순한 충절 표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이 배운 모든 것이 통하지 않는 세상을 선언한 행위에 가까웠습니다.
세 사람의 핵심분석 — 낭만화가 아니라 구조로 읽어야 한다
세 사람을 '천재 아웃사이더'로 묶는 시각이 있는데, 저는 여기서 한 가지 점검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아웃사이더라는 표현은 마치 개인의 선택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시대의 구조가 이 사람들을 밀어낸 측면이 더 큽니다. 이 세 사람 모두 당대에는 실패했습니다. 허균은 역모죄로 능지처참을 당했고, 이지함의 개혁 상소는 조정에서 묵살됐으며, 김시습의 금오신화(金鰲新話)는 오랫동안 금서(禁書)로 취급됐습니다. 금서란 국가나 권력이 유통과 열람을 금지한 책을 뜻하는데, 당시 유학자가 귀신과 인간의 사랑을 다룬 소설을 썼다는 것 자체가 용납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들을 '앞서간 인물'로 평가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지금의 시선입니다.
그런데도 이 세 사람의 사상은 각각 뚜렷한 공통점을 향합니다. 제가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 허균의 호민론(豪民論)은 백성을 수동적 피지배층이 아닌 시대를 바꾸는 주체로 봤습니다. 호민이란 시대의 흐름을 읽고 권력에 맞설 수 있는 백성을 뜻합니다.
- 이지함은 상업을 국가 부(富)의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국부론(國富論)이란 쉽게 말해 나라를 부유하게 만드는 방법에 관한 이론인데, 아담 스미스보다 약 200년 앞선 발상이었습니다.
- 김시습은 유불도(儒佛道)를 아우르는 융합 사상을 추구했습니다. 유불도란 유교·불교·도교를 합쳐 부르는 말로, 어느 하나에 갇히지 않는 사유 방식이었습니다.
특히 이지함이 직접 장사를 하고 거리의 거지들을 모아 기술을 가르쳤다는 이야기는 지금 읽어도 낯설게 느껴집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말과 행동 사이의 간극을 줄인 사람이 얼마나 드문가를 생각했습니다. 지금 시대에도 그런 실천이 쉽지 않은데, 양반이 직접 상인이 되는 것이 사회적 신분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조선에서 그 선택이 얼마나 이례적이었을지는 짐작조차 어렵습니다. 이지함이 만든 거린청(居隣廳)은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사회복지기관에 해당합니다. 거린청이란 거지와 빈민을 수용해 기술을 가르치고 자립을 돕기 위해 만든 기관을 뜻합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김시습은 생육신(生六臣) 중 유일하게 승려의 삶을 선택한 인물로, 유학·불교·도교를 넘나드는 독창적 사유로 조선 전기 지성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수백 년이 지난 현재시점에서 이 세 사람이 여전히 읽히는 이유
이지함의 토정비결(土亭秘訣)은 지금도 설날마다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주팔자(四柱八字)란 태어난 연·월·일·시를 기반으로 운명을 풀이하는 방식인데, 토정비결은 그보다 훨씬 간결하고 한글로 쓰여 있어 누구나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흥미롭게 본 것은 내용의 상당 부분이 긍정적인 쪽으로 채워져 있고, 부정적인 내용에도 해결책이 붙어 있다는 점입니다. 어렵게 사는 백성들에게 한 해를 버틸 희망을 주고 싶었던 마음이 읽힙니다.
허균의 홍길동전(洪吉童傳)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사회 구조적 불합리를 정면으로 다룬 소설입니다. 서얼(庶孼)이란 양반 아버지와 첩 사이에서 태어나 신분상 차별을 받은 계층을 뜻하는데,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현실은 당시 수많은 사람의 실제 삶이었습니다. 영국의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책으로 남긴 것과 달리, 허균은 그 꿈을 소설 속 율도국(栗島國)으로 표현하다가 결국 역적으로 처형됐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허균은 광해군 10년(1618년) 역모 혐의로 처형됐으며, 그의 저작들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공식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제 경험상, 이 세 사람을 따로 읽을 때와 함께 읽을 때의 느낌은 완전히 다릅니다. 나란히 놓고 보면 공통된 질문이 드러납니다. 신분보다 능력이 먼저인가, 백성의 생계가 의례보다 앞서는가, 불합리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삶을 뜻하는가. 이 질문들이 조선 시대에 던져졌다는 사실이 이상한 것이지, 질문 자체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결국 이 세 사람이 수백 년이 지나도록 다시 읽히는 이유는, 그들이 남긴 답이 아니라 그들이 던진 질문 때문입니다. 허균, 이지함, 김시습의 삶이 궁금하다면, 대표작 하나씩만 붙들고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홍길동전, 토정비결, 금오신화 — 셋 다 길지 않습니다. 읽고 나서 이 사람이 왜 이 글을 썼을까를 한 번 생각해보면, 교과서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참고: https://youtu.be/PUc2I06Rd34?si=TNTufQOM6GPO-tGk
📌 생각 한 줄
"허균, 이지함, 김시습. 이들은 당대에는 실패했지만, 그들이 남긴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신분보다 능력인가, 백성의 생계가 의례보다 앞서는가, 불합리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삶인가.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들의 질문 앞에 여전히 서 있다. 그게 바로 이들을 '천재'라고 부르는 진짜 이유다."